예수님의 눈물 속에서 오늘을 보다... 탄핵정국과 하나님의 정의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룰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 19:41-44)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누가복음 19장 41절에서 44절은 그 장면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단순한 감정의 발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 도성이 맞이할 미래의 비극을 향한 깊은 애통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눈앞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그 평화를 보지 못하고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 선택이 불러올 운명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슬픔에 잠겨 통곡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떠올리며 오늘 우리 사회를 돌아봅니다. 법과 정의가 공정하게 실현되어야 할 곳에서 오히려 불의가 자리 잡고, 공권력은 원칙을 떠나 편향된 길을 걸어갑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정당한 법 절차에 따라 평가받지 못하고, 잡범이나 간첩보다 훨씬 저급하게 취급되는 현실을 보며, 우리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눈물을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그들의 눈을 가려 정의와 평화를 보지 못하게 만든 것일까요?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공정함을 외면하게 했을까요? 정치적 득실 때문에 법적 절차도 무시되는 것일까요?

오늘날 우리나라가 직면한 현실을 보면 더욱 깊은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법적·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중국의 끊임없는 간첩 행위가 국가 안보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공산주의적 책동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보이는 정당과 정치인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국가의 주권과 국민의 자유를 지키는 대신, 간첩행위로 대변되는 외세의 간섭과 불의한 의회 일방 폭주를 용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길입니다. 정의는 특정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왜곡되어서는 안 되며, 참된 공의는 하나님의 진리를 기반으로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는 단순한 심판이 아니라 회복을 향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공의로우면서도 동시에 자비롭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스스로의 탐욕과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그 정의는 왜곡되고 평화는 감춰집니다. 

예루살렘의 백성들이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 구원의 손길을 외면했듯이,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자신의 신념과 이해관계 속에서 참된 정의와 공의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흘리신 눈물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경고였습니다.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로마의 압제 속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집중하며, 백성들에게 참된 평화를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결국 멸망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정의를 외면하고, 법과 원칙을 무너뜨릴 때, 그 끝이 어떠할지는 자명합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정의를 다시 생각하고, 참된 평화가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눈물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정의는 힘의 논리가 아니라, 진리 위에 세워질 때 비로소 참된 의미를 가집니다. 평화는 단순한 타협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실현될 때 우리 가운데 머물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사회가 당면한 혼란 속에서 무엇이 하나님의 정의이며, 어떤 길이 참된 평화로 가는 길인지 겸손한 마음으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셨던 그 평화가 우리의 삶과 이 나라 위에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