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도행전 9장 1절–9절
믿지 않으려는 세상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시대가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얼마나 완강한 시대인지를 매일같이 체감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도를 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도덕적이라며 호감을 보이기도 하지만, 정작 예수님의 신성과 부활에 이르면 고개를 저어버립니다.
특히 이른바 식자층, 고학력자들일수록, 더욱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이곤 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활이 과연 가능한가?”
“십자가에 죽은 한 청년이 인류의 구원자가 될 수 있는가?”
그들에게 복음은 신화이거나, 비논리적인 종교 체계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떤 말로 다가갈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속 사울, 그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정통한 엘리트였고,
율법과 종교 전통에 누구보다 철저한 식자층 중의 식자층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라는 이름 자체를 거부하고, 부정하며, 적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자를 찾아가셨습니다.
빛 가운데 나타나셨고, 그의 신념을 무너뜨리고,
그의 눈을 감기셨다가,
영적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사울의 이야기를 통해
복음을 거절하는 시대 앞에서 우리가 어떤 확신을 가져야 할지를 배웁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혹시 아직까지 ‘주’가 누구이신지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울처럼, 예수 앞에 무릎 꿇게 되기를 소망하며 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열심은 진리와 다를 수 있다
사울은 핍박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단순한 폭력적 광신자로 보면 안 됩니다.
그는 당시 누구보다도 율법에 충실했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자였고, 순수한 유대 신앙의 수호자였습니다.
그는 유대교를 사랑했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는 신성모독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자신이 메시아라 주장했고, 결국에는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 자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무리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현실은, 사울의 신앙적 분노를 자극했습니다.
사울의 열심은 곧 의무였고, 그 의무는 ‘이단의 무리’로 간주된 제자들을 뿌리째 뽑아내는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무려 240킬로미터 거리도 그의 열심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열차였습니다.
열정은 있었지만, 방향은 틀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열차를 급정거시키셨습니다.
2. 빛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
그 날, 그 길 위에서 사울은 쓰러졌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더라.”
유대교에 정통했던 사울에게 이 장면은 낯설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묵시문학, 에스겔서와 이사야서, 다니엘서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임할 때 빛이 비추는 장면은 반복되었습니다.
그 빛은 하나님의 진리, 구원, 종말의 임박을 상징하는 계시의 도구였습니다.
사울은 땅에 엎드립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단 하나,
바로 흙으로 돌아가듯 엎드리는 것뿐입니다.
그는 지금 단순히 놀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창조주 앞에 피조물로서 항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충격은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3. “주여, 누구시니이까?” – 그가 부른 ‘주’는 누구였는가
엎드린 사울에게 하늘의 음성이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그는 두려움 속에 묻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 짧은 질문, 그러나 무게감 있는 한 문장은 사울의 신앙과 인생 전체를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됩니다.
그는 이 음성을 예수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한 ‘주(Lord)’는 구약에서 오직 한 분, 하늘의 하나님, 야훼만을 의미하는 호칭이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그 말은 곧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그는 지금 하늘의 계시 앞에 서 있고, 그 계시의 주체는 틀림없이 ‘하나님’이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응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떨어졌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 한마디는 사울의 영혼에 직격탄처럼 꽂힙니다.
그가 부른 ‘주(Lord)’가, 그 빛의 중심에 서 계신 분이, 그토록 부정하고 저주했던 예수라는 사실! 그 진실은 그의 정신과 신앙, 전 존재를 송두리째 뒤흔듭니다.
그는 지금 깨닫고 있습니다.
‘예수’는 죽은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살아 계셨고, 지금 이 계시의 주체로 하늘 보좌 위에서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이 진리는 사울의 모든 신념을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그 무너짐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4. 예수, 교회의 머리이시며 계시의 주(Lord)이시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또 하나의 신학적 진실을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울은 예수님을 직접 박해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박해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제자들을 핍박했고, 교회를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곧 내 몸이다. 내 백성을 박해하는 것은 곧 나를 박해하는 것이다.
이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도는 그 몸의 지체라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해치는 것은 곧, 살아 계신 주님을 대적하는 것이 됩니다.
사울은 이 모든 진실 앞에 엎드려졌습니다.
눈이 멀었지만, 그의 영혼은 처음으로 빛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5. 무너짐 이후에야 시작되는 새로운 사명
사울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합니다.
시력이 사라졌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사흘을 보냅니다.
그 사흘은 단순한 휴식이 아닙니다.
그의 모든 신학, 신념, 자아가 해체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는 단지 새로운 교리를 준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Lord)’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지금은 다시 살아 영원히 계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사울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의 모든 것을 무너뜨린 그 음성이, 동시에 그를 새롭게 세우시는 부르심의 음성이었습니다.
6. 오늘, 우리는 누구를 ‘주’라 부르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동일한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주님, 주님”을 부릅니다.
하지만 그 ‘주’는 누구입니까?
우리가 편한 방식으로 믿고 싶은 ‘주’입니까?
아니면, 빛 가운데 나타나 우리를 꺾고, 무릎 꿇게 하고, 무너뜨리는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주님은 오늘도 묻고 계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왜 나 없이 살려 하느냐?”
“왜 진리 앞에서 눈을 감고 있느냐?”
우리가 진심으로 묻는다면, 사울처럼 진실하게 이렇게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그리고 그 질문 속에서,
빛은 임할 것이며,
그리스도는 응답하실 것이며,
우리의 신앙은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7. 주님의 몸된 지체로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사울이 바울이 된 사건은 단순한 회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신념을 무너뜨리고, 그 위에 복음의 사도를 세우셨습니다.
그의 고백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하늘의 주권 앞에서 무너진 자의 항복이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우리는 그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분이 아닙니다.
예수는 주님이시며,
오늘도 살아 계시며,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다시 부르십니다.
그 주 앞에 엎드립시다.
그 주 앞에 무릎 꿇읍시다.
그리고 그 주님만을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입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