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강을 건너는 순례자 —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경계에서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마가복음 1:15)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태복음 24:36)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 이 ‘때’, 그리고 ‘그때’는 단순한 시계의 눈금이나 달력의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옷을 입고 다가오는 신비,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사이를 흐르는 보이지 않는 강물과도 같은 기독교의 시간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는 이 흐름을 장엄하게 노래했다.
가이아(대지)는 우라노스(하늘)를 낳았고, 대지는 하늘과 결합하여 무수한 신들을 낳았다. 그러나 우라노스는 자식들을 두려워해 어둠 속에 가두었고, 분노한 가이아는 막내아들 크로노스(Chronos)를 부추겨 낫으로 우라노스의 그곳을 거세하게 했다.
우라노스의 피와 거품에서 다시 새로운 생명들이 태어났다. 크로노스는 하늘을 몰아내고 세상을 지배했지만, 자신 역시 자식에게 몰락하리라는 예언에 사로잡혀, 태어나는 아이들을 삼켜버렸다.
그러나 제우스는 살아남아, 끝내 크로노스를 물리치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질서를 세운다.
이 끊임없는 대립과 교체의 서사시는 인간이 사는 수평적 시간의 흐름, 양적 시간을 상징한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이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르고, 세대는 낡고 사라지며,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또한 카이로스(Kairos)도 알았다. 앞머리에만 머리카락이 난 채, 뒷머리는 민머리이고, 발뒤꿈치에 날개가 달린 신. 카이로스는 단 한 번, 스쳐 지나가는 기회의 시간을 뜻한다.
그것은 준비된 자만이 앞에서 붙잡을 수 있으며,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손에 잡을 수 없는 순간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단순한 연장이 아니다. 그것은 수직적으로 솟구치는 질적인 시간, 즉 영원을 꿰뚫는 창과 같다.
결국, 크로노스(Chronos)는 수평적으로 흐르는 시간, 카이로스(Kairos)는 하늘로부터 찬란히 떨어지는 기회의 섬광이자 하나님의 시간이다.
이 두 시간의 교차는 단지 신화에만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역사의 어느 순간, 크로노스의 강을 가르고 솟구치는 카이로스의 빛을 목격한다.
그 카이로스의 시간은 튀르키예의 에페소스(Ephesus) 근방, 터키의 푸른 언덕과 청색 하늘 사이에서 기적처럼 그 자태를 드러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조용한 마을 쉬린제(Şirince) 근처, 성모 마리아의 마지막 거처로 전해지는 성모 마리아의 집(Meryemana Evi) 이야기다.
19세기 초, 독일의 수녀 안나 카타리나 에머리히(Anna Katharina Emmerick, 1774–1824)는 병상에 누워 눈을 감은 채, 신비한 환시를 보기 시작했다.
1820년경, 그녀는 십자가 사건 이후, 사도 요한이 성모 마리아를 데리고 먼 소아시아로 건너갔으며, 에페소스 인근의 한 산 중턱 조그만 돌집에 마리아를 모셨다는 세밀한 환시를 남겼다.
그녀는 그 땅을, 그 하늘을, 그 바람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건만, 그려낸 묘사는 살아 있는 것처럼 선명했다.
70여 년이 흐른 뒤, 프랑스의 신부 쥘리앵 구예(Julien Gouyet)는 수녀의 환시기록을 손에 들고 머나 먼 터키로 향했다.
1891년, 그는 불불다기(Bülbüldağı, ‘나이팅게일 산’)의 고요한 언덕 위에서, 에머리히 수녀가 본 그대로의 작은 석조 건물을 찾아낸다.
아치형 천장, 샘물 흐르는 자리, 돌담의 온기까지. 환시와 현실은 한 점으로 이어졌고, 감춰졌던 카이로스(Kairos)가 수십 년의 크로노스(Chronos)를 꿰뚫고 솟아올랐다.
이 집은 곧 성모 마리아의 마지막 거처로 인정되었고, 오늘도 하늘을 향한 순례자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는다.
두 번째 이야기는 더 먼 고대의 시간으로 우리를 이끈다.로마 황제 데키우스(Decius)가 지배하던 AD 249년경, 기독교는 죽음의 위협 아래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에페소스의 일곱 젊은 청년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산 속 동굴로 몸을 숨겼다. 그들은 절망의 기도 끝에,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 속으로 사라졌다. 로마 병사들은 동굴 입구를 봉인했고, 하늘은 그 젊은 청년들에게 깊은 잠을 허락했다.
크로노스는 흐르고, 제국은 무너지고, 새로운 별들이 떠오르고 지는 사이, 200년이 넘는 세월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AD 447년, 기독교가 공인되고 세상이 변한 어느 날,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 시대에, 우연처럼, 그러나 필연처럼 동굴이 열렸다.
잠에서 깨어난 청년들은 겨우 하룻밤 잤다고 생각했으나, 그들의 세상은 이미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시간의 강 한가운데 붙들어 세우셨고, 부활과 영생의 표징으로 삼으셨다. '일곱 잠자는 청년들'의 동굴은 오늘날까지도 기독교와 이슬람 모두에게 살아 있는 신앙의 증거로 남아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본다. 시간은 인간에게는 쇠락이지만, 하나님께는 찬란한 부활이라는 것을.
일곱 소년들의 전설은 단지 옛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강을 가로지르는 카이로스의 다리, 영원의 증거이다.
이 두 이야기는 부드럽게 우리를 향해 묻는다.
"당신은 크로노스만을 따라 살아가겠는가, 아니면 카이로스를 기다릴 줄 아는가?"
우리 삶은 매일, 시계의 초침 속을 걷는다. 그러나 그 째깍거리는 흐름 너머, 우리는 귀 기울여야 한다. 언제 어느 순간,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시간이 우리 앞에 문득 다가올지 모른다.
성모 마리아의 조용한 집, 깊은 잠에서 깨어난 소년들의 맑은 눈빛처럼, 하나님의 시간은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시계의 바늘이 흐르는 크로노스 속에서도, 하늘의 숨결이 닿는 그 단 하나의 순간 카이로스의 시간을 기다리며 우리는 시간의 강을 건너는 순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