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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_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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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방주, 우리의 하나님, 그리고 진리의 감응
본문: 창세기 6:5-8, 7: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창세기의 노아 홍수 이야기와 길가메시 서사시의 대홍수 이야기를 비교하며, 이 고대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이 신화(神話)라고 하면 '사실이 아닌 이야기', '재미있는 옛날이야기' 정도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고대 사람들에게 신화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었습니다. 신화는 그들의 삶과 세계관, 그리고 세상의 진실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장르였습니다. 길가메시 서사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자신들의 삶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신학자나 비교문학자들은 창세기를 포함한 여러 고대 문헌들을 학문적으로 비교 연구합니다. 그렇게 보면 창세기 역시 여러 신화 중 하나로 평가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창세기의 말씀을 읽으며, 다른 신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특별한 '감응'을 경험합니다. 왜 그런지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진리의 메아리인 것입니다.
길가메시 서사시와 창세기의 홍수 이야기는 많은 유사점을 가집니다. 신(들)의 분노, 방주를 만드는 의인, 그리고 홍수 이후의 제사. 그러나 이 유사성 속에서 두 이야기의 본질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길가메시 서사시 속의 신들: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홍수는 인간이 일으키는 소음 때문에 일어납니다. 최고신 엔릴은 "인간들의 소음이 너무 크니, 잠을 잘 수가 없다"고 불평하며, 모든 인류를 멸망시키려 합니다. 다른 신들은 인간을 지혜의 신인 자신들이 지어냈기 때문에 보존해야 한다고 말하며, 논쟁을 벌입니다. 결국 신들은 인간 멸망에 대한 맹세를 하고, 엔키는 그 맹세를 어기지 않기 위해 우트나피쉬팀에게 "꿈"의 형식으로 홍수의 계획을 알려줍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신들은 무책임하고 변덕스럽습니다. 인간을 창조한 것도, 홍수를 일으키는 것도 모두 자신들의 필요와 감정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홍수 후에 살아남은 우트나피쉬팀이 바치는 제사를 보고, 신들은 "파리 떼처럼 모여들었다"고 묘사됩니다. 그들은 인간의 제사에 굶주린 존재처럼 행동하며, 그들의 권능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았습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 반면, 창세기에서 홍수는 인간의 죄악 때문입니다. **창세기 6장 5절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인간의 소음이 시끄러워 화를 내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지으신 인간이 타락하는 모습을 보시며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세기 6: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무자비한 분노가 아니라,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정화하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깊은 고뇌와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또한 창세기에서는 당시 계급 사회의 가치관을 뛰어넘는 혁명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인간은 신들의 노예로서 그들을 섬기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7)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신들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귀한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를 위해 신전을 지으라'고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인간을 위해 '에덴'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터전을 직접 만드시고, 그곳에서 인간이 살 수 있도록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신이 인간을 위해 일하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구조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의 차이 때문에 당시 계급사회의 시각에서 본다면, 길가메시 서사시와 같은 이야기가 오히려 당대 삶의 진실을 더 잘 반영한 훌륭한 신화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창세기에 감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우리를 이용하는 신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고 섬기는 참된 하나님의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시의 계급 사회적 관점에서 본다면 창세기는 결코 좋은 책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남녀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인간은 신을 섬기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신의 도움을 받는 존재라는 이야기는 그들의 삶의 질서와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고대 신화들이 철저한 계급 사회의 진실을 반영하며, 아래 계급이 위를 섬기는 구조를 당연시했던 것과 달리, 창세기는 인간이 신의 형상을 닮은 존귀한 존재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절, 창세기와 같은 문서가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성적으로나 가치적으로 다른 신화보다 더 우월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 이야기에 깊이 감응했습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습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도,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창세기에 담긴 삶의 진실, 그리고 참 하나님을 보여주는 글과 사상, 문장과 이미지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 말씀이 진리임을 깨닫고, 그 말씀대로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렇게 말씀에 감응하며 살아갈 때, 그들의 삶에는 기쁨과 의미가 충만해졌고, 아주 지극한 곳에서의 만족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이 되고, 특정한 신앙을 갖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때 온 세계를 정복했던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제국의 신화들은 그들의 제국과 함께 모래더미 속에 파묻혀 잊혔습니다. 그러나 그 제국의 포로였던 이들이 들려준, "신은 우리를 이용하지 않고 사랑하며, 우리는 신을 닮은 존재"라는 이 놀라운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새롭게 울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아에게 방주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방주가 되십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의 거친 파도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굳게 붙잡고, 그분이 주시는 진리의 감응 속에서 평안과 소망을 누리시는 모든 성도님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