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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_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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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예수님의 편견과 차별에 맞서는 저항적 여행'입니다.
오늘 본문은 너무나도 유명한 수가(Sychar)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흔히 이 여인의 유명세와 그녀의 슬픈 사연에 집중하느라, 요한복음 4장 1절과 2절에 담긴 슬픈 대목을 지나치기 쉽습니다.
이 대목은 당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들었던 소문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갑자기 등장한 나사렛 출신 청년, 곧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시는데, 선발 주자인 세례 요한보다 사람들이 더 많이 모인다는 잘못된 소문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바리새인들이 그 소문을 들었다는 사실까지 알고 계셨습니다. 사실 세례는 예수님 친히 베푸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베푼 것이었지만, 바리새인들은 이를 오해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소문을 듣고 마음속에 경계심이 생겼으며, 유대 땅에서 자신에 대한 적대 감정이 고조되고 있음을 발견하셨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마음 한편에 단호한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유대를 떠나'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떠나사'라는 표현은 단순히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을 넘어, 확고한 의지와 결정을 가지고 그 땅을 포기하고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유대에 머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셨습니다.
이는 복음이 유대 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예수님의 유언처럼 예루살렘과 유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결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면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I must (I had to)'라는 강한 용법을 사용하여, 사마리아 통과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지리적으로 볼 때, 유대 땅은 남쪽에, 갈릴리 땅은 북쪽에 위치하며 사마리아는 그 한복판에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지만, 정통 유대인들은 평생 사마리아 땅을 밟지 않고 먼 길을 돌아갔습니다.
이러한 갈등의 기원은 슬픈 역사적 배경에 있습니다. BC 750년경, 난폭한 아수르(앗시리아) 민족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 그들은 남겨진 이들에게 강제적으로 이방인과의 결혼을 추진하여 이스라엘 혈통을 말살하려 했습니다.
이 정책에 순응하여 피가 섞인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사실상 포기하게 되었고, 이방인의 피가 섞이지 않은 이들, 곧 정통주의자들에게 '개나 돼지' 취급을 받으며 냉소와 편견, 차별 속에서 자손 대대로 슬픈 운명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모르실 리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고 기록된 것은, 시대의 관습, 통념, 가치관, 대세에 맞서는 예수님의 거대한 저항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부당한 대우와 처사에 동의하지 않으셨으며, 세상의 대세에 휩쓸리지 않고 그 길을 가신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이 행보를 통해 단순히 길을 가는 보통 퍼포먼스가 아닌, 편견과 차별에 맞서는 저항적 행보를 보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5절은 예수님이 도착하신 장소를 수가(Sychar)라 하는 동네이며,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다고 기록합니다. 이 땅은 창세기 33장에서 야곱이 외삼촌 라반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처음 장막을 치고 산 땅이며, 세월이 지나 사랑하는 아들 요셉(부인 라헬의 아들)에게 물려준 땅이었습니다.
그 땅 근처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원문 그리스어로는 '샘'으로 번역되는데, 우물(well)은 인간이 파서 만든 한계가 있는 물이지만, 샘(spring)은 인간이 만들 수 없고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근원적인 물입니다.
성경 역사 속에서 우물 이야기는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특히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하는 내용과 관련이 깊은데,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신부감 '리브가'를 찾을 때, 야곱이 그의 아내 라헬을 처음 만날 때, 모세가 그의 아내를 모두 우물가에서 만났습니다. 이 혈통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 우물 곁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대로 앉으신 이'는 사뿐히 앉은 것이 아니라, 길고 험난한 여정 끝에 목적지에 도착하여 안도감을 느꼈을 때처럼 털썩 주저앉은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피곤하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인성), 무엇보다도 찾고자 했던 영혼을 찾기 위해 멀고 먼 여행길 끝에 목적지에 도착하셨음을 시사합니다. 이곳에서 참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대변하는 사마리아 여인의 혼인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계획된 것입니다.
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물을 좀 달라"고 하셨을 때,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인과 상종하지 않는 사회적 관습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네가)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Living Water)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구원이 예수님이 멀고 먼 길을 찾아오셔야 얻어진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생수'를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 처럼 찾아오는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가는 구원을 상징합니다.
여인은 예수님에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당신이 야곱보다 큽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여인의 머릿속 가장 큰 존재는 야곱의 우물이었으며, 이는 정상적인 '우물물'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의 존재를 점차 인식해가는 과정이었지만, 동시에 영적인 무지를 짙게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은 우물물을 주겠다고 하지 않으시고 샘물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물은 사람이 만든 한계 있는 물이지만, 샘은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자연적인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볼 때, 예수님은 자신을 '샘터(샘)'로 소개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여인의 반응은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 않게 하옵소서"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정체를 깨닫고 구세주께 물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육체적인 필요를 해소하려는 반응에 가까운 비웃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생수를 주시겠다고 했고, 그분 자신은 샘이 되십니다. 앞선 장에서 예수님은 성전을 청결케 하시며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자기 육체를 가리킨 것이며, 예수님 자신이 참된 성전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에게서 물이 나와야 합니다. 에스겔서 47장의 예언처럼,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오기 시작하여 발목, 무릎, 허리에 차고 나중에는 강물이 됩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생물이 살고, 죽었던 식물과 병든 땅이 살아나며, 바닷물까지 되살아나게 합니다.
계시록 21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라고 말씀하시며 이 예언의 성취를 선포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들(그리스도의 신부)을 찾기 위해 고난의 여정을 넘어 우물가에 주저앉으신 것입니다. 이 여인과의 대화는 곧 참 예배가 무엇인가에 대한 주제로 전환됩니다.
여인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리심 산에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듯이, 예배를 철저히 장소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참 성전이신 예수님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고 하시며, 예수님 자신을 예배하는 것이 참된 예배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생수의 강은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제도, 순서, 멋진 퍼포먼스가 아니라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눈뜸과 성령의 물이 맞대어지는 곳마다, 우리의 죽었던 삶의 자리와 죄의 문제가 자유를 얻고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 바로 참된 예배입니다. 형식과 제도가 중요했다면 예수님이 미리 정해두셨을 것이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 회복이 일어나고 삶으로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예수님처럼 편견과 차별의 장벽을 넘어, 오직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며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는 저항적 행보를 걸어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