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11-24 ) 하나님의 공의는 규칙이 아니라 생명이다



요한복음 7장 14절부터 24절까지는 예수의 공의관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장면 중 하나다. 예수는 명절 중 성전에 올라 가르치며, 사람들의 판단 기준 자체를 문제 삼는다. 그 판단은 율법을 알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율법을 사용하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는 '한 가지 일'을 이유로 분노했다. 그가 행한 “한 가지 일”(요 7:21)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동안 누워 있던 병자를 일으킨 사건이었다.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 규정을 어겼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 근거였다. 그러나 예수는 그 판단이 얼마나 모순적인지를 정확히 짚어낸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했다. 아이가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날이 안식일과 겹치면, 안식일을 깨뜨리면서까지 할례를 시행했다. 할례는 인간 신체의 단 하나의 기관에 대해 이뤄지는 행위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을 정당하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할례는 생명과 언약을 잇는 표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인간의 한 기관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 안식일을 넘어서는 것은 허용되면서, 인간의 온 몸을 회복시키는 일은 왜 비난의 대상이 되는가.

유대 랍비 전통에 따르면 인간의 신체는 248개의 지체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율법의 248개 긍정 명령과 대응되는 개념이다. 예수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단순히 병 하나를 고친 것이 아니라, 38년 동안 기능을 상실했던 인간의 전 존재를 회복시켰다. 다시 말해, 인간의 248개 지체 전체를 살려낸 것이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를 비난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의 관심은 생명이 아니라 규칙이었기 때문이다. 율법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보다, 율법을 지켰다는 형식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예수는 분명히 말한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요 7:24)

여기서 말하는 공의는 법 조문의 엄격함이 아니다. 공의는 생명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능력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언제나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규칙은 생명을 위해 존재하며, 안식일은 사람을 얽매기 위해 있는 날이 아니다.

예수의 공의는 추상적 정의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존중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누가 옳은가를 가리기보다, 누가 살아나는가를 묻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다.

오늘의 사회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종종 법과 원칙, 규정과 절차를 내세우며 스스로를 정의롭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 판단의 결과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건강하게 만들고 생명을 살리는 방향인지, 아니면 사람을 더 깊이 상처 입히는 방향인지는 묻지 않는다. 예수는 바로 그 지점을 문제 삼는다.

율법을 지키면서 생명을 외면하는 정의는 성경적 공의가 아니다. 규칙을 앞세우며 인간을 수단화하는 판단은 하나님의 판단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언제나 사람 편에 서 있고, 약자의 생명을 회복시키는 방향으로 흐른다.

요한복음 7장이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당신이 말하는 공의는 과연 누구를 살리고 있는가.
공의는 규칙이 아니라 생명이다. 예수가 보여 준 하나님의 공의는 오늘도 그 기준을 우리 앞에 세워 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