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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_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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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 양떼 우리 |
요한복음 10장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양의 문’이자 ‘선한 목자’로 계시하시는 말씀을 담고 있다.
이 두 표현은 서로 다른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진리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는 비유이다.
예수님은 양을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목자이시며 동시에 그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는 유일한 문이 되신다.
이 말씀은 단순한 목축 비유가 아니라, 당시 유대 사회에서 활동하던 종교 지도자들과 거짓 메시아 운동을 배경으로 하여 참된 구원과 참된 지도자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선언적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먼저 참된 목자와 거짓 지도자를 구별하는 기준을 제시하신다.
양의 우리에 들어갈 때 문을 통하여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오는 자는 절도요 강도라고 말씀하시며, 참된 목자는 떳떳하게 문으로 들어온다고 설명하신다.
이는 양을 사랑하여 돌보려는 마음이 아니라 양을 이용하려는 목적을 가진 자들의 특징을 드러내는 비유이다.
특히 예수님은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모세나 구약의 선지자들을 부정하는 뜻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BC 2세기 이후 유대 사회에는 유대교 변혁운동과 함께 다양한 급진적 세력들이 등장하였고, 그 가운데에는 스스로를 구원자라고 주장하는 거짓 메시아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민족의 해방을 외치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결국 그 목적은 양들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적 야망과 종교적 권력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거짓 메시아 운동에 미혹되어 생명을 잃게 되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자들을 가리켜 절도와 강도라고 규정하신다. 거짓 목자는 양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지만, 참된 목자는 양을 사랑의 대상으로 대한다.
예수님은 이러한 거짓 지도자들의 음성과 분명히 대조되는 분으로서, 생명을 주시는 유일한 문으로 우리 앞에 서 계신다.
예수님은 이어서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선언하신다. 이는 당시 중동 지역의 목축 문화에서 비롯된 매우 실제적인 비유이다.
고대 유대 지역에서는 밤이 되면 양 주인들이 양들을 공동 우리에 넣어 보호하곤 하였다.
그런데 이 우리에는 일정한 문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 목자가 직접 문 입구에 몸을 누여 밤새 양들을 지켰다. 결
국 목자의 몸 자체가 양의 문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예수님의 선언은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닌다. 예수님은 양을 보호하는 문이 되시며 동시에 생명으로 들어가는 구원의 통로가 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꼴’이라는 말은 단순히 양이 먹는 먹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생명의 공급과 삶의 의미, 그리고 영적인 풍성함을 가리킨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인간은 참된 생명을 누리게 된다.
예수님은 또한 세상의 거짓 지도자들과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대비시키신다. 도둑의 목적은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데 있지만,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하려는 데 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 전체를 설명하는 핵심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다시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신다.
여기서 ‘선한’이라는 말은 헬라어 ‘칼로스(Kalos)’로, 단순히 도덕적으로 착하다는 의미를 넘어 아름답고 고귀하며 진실한 사랑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즉 선한 목자는 단순히 의무를 다하는 목자가 아니라, 양을 향한 사랑이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드러나는 목자를 의미한다.
선한 목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양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는 데 있다. 예수님은 양을 위해 기꺼이 생명을 내어놓는 목자이시다.
반면 삯꾼은 위험이 닥치면 양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는 양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대가를 받고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 사회의 관습법인 미쉬나에 따르면, 고용된 목자는 맹수가 나타났을 때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도망갈 권리가 있었다. 따라서 삯꾼이 도망가는 것은 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양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시는 선한 목자이시며, 이 사랑은 결국 십자가에서 완전히 드러나게 된다.
예수님은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목자와 양 사이의 관계이다.
예수님은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다”고 말씀하신다.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단순한 지식이나 정보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인격적인 관계와 깊은 사랑의 교제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양들을 이름으로 아시며, 그들의 연약함과 상처까지도 아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신앙은 단순히 교리나 지식을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시선은 유대인이라는 울타리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주님은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복음이 이방 세계로 확장될 것을 예고하는 선언이다.
예수님의 구원은 특정 민족이나 공동체에 제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민족과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실제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주님의 뜻을 따라 복음을 전하며 세상을 섬겼다.
그들은 전염병이 돌던 시대에도 병든 사람들을 돌보고 가난한 이들을 섬기며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놓는 사랑을 실천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사랑의 삶을 보며 감동을 받았고, 그 결과 많은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비극적 사건이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신 사명으로 설명하신다.
주님은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다시 얻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이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희생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내어놓으실 권세도 가지고 계시며, 다시 얻을 권세도 가지고 계신다.
따라서 십자가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사랑의 행위이며, 그 뒤에는 반드시 부활의 승리가 이어지게 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서로 다르게 나타났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귀신이 들렸다거나 미쳤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말씀이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였다.
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반응은 언제나 두 갈래로 나뉘게 된다. 어떤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거부의 대상이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생명의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예수님이 단순한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0장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우리가 과연 누구의 음성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목자와 지도자들이 존재하며, 그들은 저마다의 목소리로 사람들을 이끌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하게 선언하신다.
“나는 양의 문이라.” 이 말씀은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동시에 예수님은 양을 이용하는 목자가 아니라 양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신 선한 목자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수많은 음성 가운데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하여 들어갈 때 비로소 구원을 얻고, 생명을 얻으며, 삶의 참된 풍성함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더 이상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아직 우리 밖에 있는 다른 양들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HeartWalkChu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