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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_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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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로암 못에서 눈을 씻는 맹인 |
죄만 보던 사람들에게 던진 충격적인 말씀
인생의 고난을 마주할 때 세상은 흔히 '원인'을 찾으려 애씁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한 사내를 향한 시선도 그러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완고한 통념은 고통을 곧 죄의 결과로 치부했습니다.
심지어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조차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며 인과응보의 잣대를 들이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차가운 질문을 단숨에 끊어내셨습니다. 이 고난은 누군가의 허물이 아니라, 오직 그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파격적인 소망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진흙과 침, 창조주 주님의 거룩한 재창조
주님은 말씀 한마디로 눈을 뜨게 하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이는 창세기 2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는 말씀 속 창조의 손길을 떠올리게 합니다.
흙으로 인간을 빚으셨던 성부 하나님에 이어, 성자 예수님께서 무너진 인생의 눈을 진흙으로 다시 만지시는 이 행위는 곧 타락한 세상을 향한 주님의 '재창조' 선언이었습니다.
육신의 눈을 만드는 것을 넘어, 한 영혼을 새로운 피조물로 빚으시는 거룩한 간섭이 시작된 것입니다.
실로암, 보냄 받은 사람이 암흑 속의 빛으로
주님은 그를 실로암 못으로 보내 씻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실로암'이라는 단어는 '보냄을 받았다'는 깊은 함의를 품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눈을 씻는 행위를 넘어,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자를 빛의 사자로 변모시켜 세상 한복판으로 파송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눈을 뜬 그는 이제 더 이상 구걸하던 맹인이 아니라, 어두운 도시를 밝히는 실로암의 증인이 되어 세상의 눈먼 종교와 가치관을 비추는 빛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시련 속에서 층층이 쌓여가는 단계적 신앙의 신비
눈을 뜬 사내에게는 곧바로 유대인들의 서슬 퍼런 심문과 힐책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시련은 그의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단련시켰습니다.
처음 9장 11절에서 그는 예수를 그저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라 부르며 정체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끈질긴 압박 속에서 그는 17절에 이르러 "선지자"라고 고백하며 주님을 경외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33절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라고 선포하며 주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단계에 이릅니다.
비바람이 나무의 뿌리를 깊게 하듯, 종교적 박해와 힐책은 오히려 그의 영적 안목을 단계적으로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벼랑 끝에서 마주한 인자, 그리고 종교를 향한 파문
결국 유대인들은 그를 공동체에서 파문시켜 버립니다. 유대 사회에서 파문은 구걸조차 허용되지 않는, 사회적 사형 선고와도 같았습니다.
그렇게 세상의 벼랑 끝으로 내몰려 영적 허기에 목말라하던 그에게 주님이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간절함이 극에 달한 그는 "주여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답했고, 주님이 자신을 밝히시자 마침내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는 고백과 함께 온전한 구원의 결실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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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눈뜬 자를 파문하며 자신들의 종교를 지키려 했으나, 정작 주님은 눈은 뜨고 있으되 진리를 보지 못하는 눈먼 종교, 즉 유대교를 향해 준엄한 파문을 선언하셨습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영혼은 감겨 있던 유대교를 뒤로하고, 주님은 벼랑 끝에 선 한 영혼을 재창조하여 참된 생명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의 삶 또한 때로는 파문당한 듯 외롭고 캄캄할지라도, 우리를 실로암으로 보내어 세상의 빛으로 삼으시는 주님의 재창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JJ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