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1-19 ) 사망의 악취를 넘어 평화의 입성으로


죽음의 악취를 덮은 생명의 향기

불과 얼마 전까지 베다니 나사로의 집을 지배했던 것은 요한복음 11장 39절이 증언하는 '사망의 냄새'였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부패해가는 시신이 내뿜는 그 절망적인 악취는,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한계와 슬픔의 끝을 상징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께서 그 어둠을 깨우셨고, 이제 12장에 이르러 그 자리는 죽음의 악취가 아닌, 온 집안을 가득 채운 지극한 '향유의 냄새'로 치환됩니다.


명분을 이긴 사랑, 거룩한 낭비의 순간

이 거룩한 변화의 중심에는 마리아가 서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순전한 나드 향유를 가져와 예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냅니다. 

하지만 이 눈물겨운 헌신 앞에 가룟 유다는 차가운 경제 논리를 들이댑니다. 

노동자의 1년 치 임금을 허비하는 것이 "쓸데없는 짓"이라며,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좋지 않으냐"는 매우 적절해 보이는 명분을 내세운 것입니다.


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아는 주님의 시간

그러나 주님은 "그를 가만 두어라"고 엄히 말씀하십니다. 이 명령은 마리아가 그 짧고도 영원한 사랑의 순간을 온전히 누리게 하라는 주님의 깊은 배려였습니다. 

제자들조차 깨닫지 못한 주님의 다가올 희생을 오직 마리아만이 영적인 직관으로 알아차리고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라는 고결한 명분을 앞세워, 마리아의 진심 어린 사랑을 가로막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도덕과 효율이라는 잣대로는 결코 잴 수 없는 '사랑의 시간'이 있음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겸손한 평화

이 향유의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 이튿날 예루살렘은 거대한 환호성으로 들썩입니다. 

수많은 인파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칩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린 예수가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로마를 물리치고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는 정치적 기대가 정점에 달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축제의 한복판에서 예수께서 택하신 것은 늠름한 군마(軍馬)가 아닌, 보잘것없는 '어린 나귀'였습니다.


향기를 머금고 걷는 십자가의 길

군마가 정복과 전쟁의 속도를 상징한다면, 나귀는 겸손과 느림, 그리고 평화의 상징입니다. 

세상은 힘의 논리로 왕의 귀환을 노래했지만, 주님은 마리아가 부어드린 향유 냄새를 몸에 머금은 채, 가장 낮은 곳에서 평화를 일구는 왕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겉으로는 승리의 행진처럼 보였으나, 그 길은 사실 마리아가 예비한 장례의 길이자, 온 인류를 살리기 위해 당신을 내어주는 희생의 길이었습니다.


우리 삶의 향유를 위하여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유다처럼 합리적 명분에 갇혀 주님을 향한 사랑을 '낭비'라 치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망의 냄새가 진동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주님의 희생을 미리 맛본 마리아의 향유이며, 낮고 느린 행보로 평화를 일구신 어린 나귀의 겸손입니다. 

그 거룩한 낭비와 평화의 발걸음이 시작될 때, 우리 삶의 악취는 사라지고 비로소 그리스도의 진정한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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